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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드 뒤누아 백작


장 드 뒤누아 백작


장 드 뒤누아 백작(프랑스어: Jean de Dunois, 대개 오를레앙의 서자(bâtard d'Orléans) 혹은 장 도를레앙(Jean d'Orléans), 1402년 11월 23일 ~ 1468년 11월 24일)은 루이 1세 도를레앙 공작와 마리에트 앙갱(Mariette d'Enghien)의 사생아이다.

그의 경력 중 가장 많이 알려진 이름은 대개 "오를레앙의 사생아"(bâtard d'Orléans; 바타르 도를레앙)라고 불렸다. 그가 왕실 가문으로 인정받게 된 것은 배다른 형의 포로신세로 인해 사실상의 첫 번째 계승자가 될 자격이 되었던 것이다.

1407년 아버지 루이가 암살되었고, 배다른 형 샤를은 1415년 아쟁쿠르 전투에서 잉글랜드의 포로가 되어 10년간 구금되었다. 오를레앙 가문에서 유일한 성인남자는 이제 장 밖에 없었다.

샤를 6세의 치세 때 그는 프랑스 내란에서 아르마냐크파로서 참가해 1418년 부르고뉴파에게 사로잡혔다. 1420년에 해방된 뒤 그는 도팽 샤를을 섬기며 백년 전쟁에서 잉글랜드 군대와 전투를 벌였다.

백년 전쟁때에는 오를레앙 공략 총사령관이 되어, 잔 다르크와 함께 오를레앙의 포위를 진행했다. 그는 이 전투 이후 잔다르크와 행동을 함께하며 그녀가 죽을 때까지 그녀의 휘하에서 전투를 벌였다.

또 백년 전쟁 종결후 오랜 전우였던 알랑송 공 장 2세를 체포했다(죄목은 불명).

샤를 7세 사후, 그의 후계자에게 불만을 품은 뒤누아 백작은 1465년 공익 동맹(리그 뒤 비앙 퓨브리크)에 참가했다.

결혼과 자손

그는 1422년 4월 부르주에서 마리 르베(Marie Louvet ;1426년 사망)와 결혼했으나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

1439년 10월 26일 하르쿠르의 마리(Marie of Harcourt ;1464년 사망)와 2번째 결혼을 올렸고, 그녀는 파르트네의 영주권을 갖고 있었다. 슬하에 2명의 아이를 두었다.

  • 프랑수아 다를레앙-롱그빌(François d'Orléans-Longueville; 1447년-1491년), 뒤누아 백작, 탕커빌, 롱그빌, 몽고메리, 바렝그벡 남작, 멜룬의 자작, 프랑스의 시종, 도팽과 노르망디의 지배자, 노르망디의 시종과 총사령관 등. 1466년 7월 2일 아그네스 드 사부아(1445-1508년)와 결혼했다.
  • 카트린 다를레앙(Catherine d'Orléans; 1449년-1501년) - 루시 백작 장 7세(요한 폰 잘브뤼겐( John VII of Saarbrucken);1430-1492년)와 1468년 5월 14일 결혼했다.

작위, 칭호

  • 프랑스 대시종(1403년 - 1468년) 1살때부터
  • 바르보네 영주(1421년 - 1468년)
  • 모르텡 백작(1421년 - 1425년)
  • 생소뵈르 자작
  • 피리고드 백작(1430년 - 1439년)
  • 뒤누아 백작(1439년 - 1468년)
  • 롱그빌 백작(1443년 - 1468년)

외부 링크

  • Biography from Oriflamme - French Medieval history page
  • Brief Bi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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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프 도를레앙 (1838년)


필리프 도를레앙 (1838년)


파리 백작 루이 필리프 알베르 도를레앙(프랑스어: Louis Philippe Albert d'Orleans, 1838년 8월 24일 ~ 1894년 9월 8일)은 1842년부터 1848년까지의 프랑스의 마지막 프랭스 루아얄(Prince royal)이다. 1848년부터 1883년까지는 프랑스의 왕위 요구자로서 루이 필리프 2세라는 이름을 썼으며 1883년부터 1894년까지는 필리프 7세라는 이름을 썼다. 그는 작가였고 미국 남북 전쟁에 참가하기도 했다.

생애

1838년 8월 24일 루이 필리프 1세와 마리아 아말리아 테레사 디 시칠리아 왕녀의 손자이자 페르디낭 필리프 도를레앙 공작과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헬레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페르디낭 필리프가 1842년 7월 13일 사망하자 왕세자가 되었다. 물론 왕의 적자가 아니라 왕의 적손자이므로 공식적인 왕세자가 아니라 추정 상속인이다.

1848년 2월 24일 2월 혁명이 일어나자 할아버지 루이 필리프 1세는 도망갔고 상원은 필리프의 왕위계승권을 무시하고 프랑스 제2공화국을 선포하면서 왕실에서 쫓겨났다. 그는 스스로를 루이 필리프 2세로 칭하며 오를레앙파의 왕위 계승권을 요구했다. 1871년 프랑스 총선에서 의석 과반을 차지한 부르봉 왕가 지지파와 오를레앙가 지지파들이 입헌군주제하에서, 자녀가 없는 앙리 5세를 국왕으로 하고 필리프 도를레앙을 왕위 계승자로 삼기를 합의했다. 그러나 앙리5세의 시대착오적인 이념탓에 프랑스에 왕정이 들어서지 못했고, 1883년 8월 24일 부르봉 왕가 출신의 왕위 요구자였던 앙리 5세가 사망했을 때는 필리프 도를레앙이 왕위에 오르기에는 너무 늦어버리고 말았다. 1894년 9월 8일 사망하였다.

가족

자녀

그는 마리 이자벨 도를레앙(1848 ~ 1919)과 결혼해서 8명의 자식을 낳았다.

같이 보기

  • 파리 백작

각주

외부 링크

  • 위키미디어 공용에 필리프 도를레앙 관련 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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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submitted to CC-BY-SA license. Source: 필리프 도를레앙 (1838년) by Wikipedia (Historical)



잔 다르크


잔 다르크


잔 다르크(프랑스어: Jeanne d'Arc, 문화어: 쟝느 다르크, 1412년 1월 6일 ~ 1431년 5월 30일) 또는 아르크의 성녀 요안나(라틴어: Sancta Ioanna Arc)는 백년 전쟁에서 활약한 프랑스의 수호성인이다. 오를레앙의 처녀(la Pucelle d’Orléans)라고도 불린다.

영국과 프랑스 간의 백년 전쟁이 진행 중이던 1412년 프랑스 북동부 지방 동레미에서 농부의 딸로 태어났다. 프랑스를 구하라는 천사의 계시를 받았다며 1429년 샤를 7세를 찾아가 신뢰를 얻고 백년 전쟁에 참전하였다. 이후 오를레앙 포위전을 비롯한 여러 전투에서 용감하게 앞장서서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아 프랑스군의 승리를 이끌었고, 이로써 샤를 7세는 랭스 대성당에서 프랑스 국왕으로서의 대관식을 치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1430년 5월경 부르고뉴 군대에 사로잡힌 후 잉글랜드에 넘겨졌다. 잉글랜드는 종교 재판을 통하여 잔 다르크에게 반역과 이단 혐의를 씌운 후에 화형에 처하였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20세(만 19세)였다.

그로부터 25년 후에 교황 갈리스토 3세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종교재판소가 잔 다르크에 대한 심사를 재개하였다. 재심 결과 그녀에게 씌워졌던 모든 혐의에 대해서 무죄라는 판결이 내려졌으며 순교자로 선언되었다. 1909년에 잔다르크는 시복되었으며, 1920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잔 다르크는 투르의 마르티노, 루이 9세, 리지외의 성녀 데레사 등과 더불어 프랑스의 공동 수호성인으로 추대되었다.

오늘날 잔 다르크는 서구 문화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다. 특히 잔 다르크는 프랑스에서 애국주의의 상징이 되었다. 특히 제1차 세계 대전 때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한 선전 소재로 자주 쓰였으며, 군인들은 잔 다르크의 탄생지인 동레미라퓌셀(라퓌셀은 처녀라는 뜻으로, 잔 다르크를 기려 본래의 지명 동레미에 추가되었다)을 순례하기도 했다. 그리고 잔 다르크를 소재로 한 영화와 만화, 소설, 회화 등의 수많은 작품들이 만들어졌다. 잔 다르크는 흔히 깃발을 들고 백마 위에 올라탄 기사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배경

백년 전쟁은 1337년 프랑스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잉글랜드 플랜태저넷(랭커스터) 왕가와 프랑스 발루아 왕가 간에 분쟁이 일어난 것을 계기로 발발하였다. 백년 전쟁이라고는 하지만, 중간 중간에 여러 이유들로 인하여 휴전 기간이 있었다. 모든 전투는 프랑스 영토 내에서 일어났으며, 잉글랜드군의 공격과 횡포로 인하여 프랑스 경제는 거의 마비 상태에 이르렀다. 프랑스 인구수는 이전 세기에 휩쓸었던 흑사병의 피해 이후 아직 회복 단계에 이르지 못한 상태였으며, 상인들은 외국 시장으로부터 철저하게 고립되어 있었다. 잔 다르크가 등장할 무렵에 잉글랜드는 이미 프랑스 영토를 거의 점령하였으며, 프랑스는 약 30년 동안 단 한번도 승리를 거두지 못한 실정이었다. 역사학자 켈리 드브라이스는 “13세기 프랑스 왕국에는 그림자만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라고 표현하였다.

잔 다르크가 태어난 당시 프랑스 국왕은 샤를 6세였는데, 종종 발작을 일으키곤 하였기 때문에 나라를 제대로 통치하기 어려워하였다. 그리하여 샤를 6세의 남동생인 오를레앙 공 루이와 샤를 6세의 사촌인 부르고뉴 공작 장 간에 프랑스 섭정 및 샤를 6세의 자녀들에 대한 법정 후견인 자리를 놓고 치열한 권력 다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들 간의 다툼은 샤를 6세의 왕비인 바이에른의 이자보와의 간통 및 왕손들의 납치 혐의 고소로까지 격화되었다. 결국 1407년 부르고뉴 공작의 지시로 오를레앙 공작은 암살당하기에 이르렀다.

오를레앙 공을 따르던 세력과 부르고뉴 공작을 따르던 세력은 각각 아르마냐크파와 부르고뉴파라는 이름의 파당을 결성하였다. 프랑스 내에서 이처럼 권력 다툼이 심화되자 잉글랜드 국왕 헨리 5세는 이를 프랑스를 침공할 기회로 여겼다. 그리하여 1415년 잉글랜드군은 아쟁쿠르에서 극적인 승리를 거두고, 프랑스 북부의 여러 도시를 병합하였다. 샤를 6세의 아들이었던 샤를 7세는 형들이 잇달아 사망함으로써 14세의 나이에 프랑스의 제1왕위계승자인 도팽의 자리에 올랐다. 그의 첫 번째 정치적 행보는 1419년 부르고뉴 공작과 평화조약을 맺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 조약은 아르마냐크파 사람들이 도팽 샤를이 안전을 직접 보증하고 열린 회담장에서 부르고뉴 공작 장을 암살함으로써 재앙으로 끝났다. 새 부르고뉴 공작이 된 필리프는 부친이자 전직 부르고뉴 공작의 암살 문제로 도팽 샤를을 배척하고 잉글랜드와 손을 잡았다. 그리하여 프랑스 영토의 상당 부분이 잉글랜드-부르고뉴 동맹 측에 넘어가게 되었다.

1420년 프랑스 왕비 이자보는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아들인 도팽 샤를 대신에 잉글랜드의 헨리 5세 국왕과 그의 후계자에게 넘긴다는 내용의 트루아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러자 이자보 왕비와 사망한 오를레앙 공작 사이에 일어났던 스캔들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으며, 도팽 샤를이 샤를 6세의 친자가 아니라는 주장까지 제기되었다. 헨리 5세와 샤를 6세는 1422년에 각자 후사를 남긴 채 2개월 간격을 두고 사망하였으며, 헨리 5세의 아들인 헨리 6세는 잉글랜드와 프랑스 두 왕국의 군주가 되었다. 헨리 6세는 아직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헨리 5세의 동생인 랭커스터의 존(베드포드 공작)이 섭정의 자리에 올랐다.

1429년 초에는 프랑스 북부의 거의 모든 지역과 남서부의 일부 지역이 모두 잉글랜드의 지배하에 놓여 있었다. 부르고뉴파가 랭스를, 잉글랜드는 파리를 거점으로 통치하였는데, 랭스는 전통적으로 프랑스 국왕의 대관식이 열리는 장소였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는데, 왜냐하면 아직 어느 쪽 프랑스 왕위 주장자도 공식적으로 프랑스 국왕으로서 대관식을 거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잉글랜드는 프랑스 왕실을 지지하는 얼마 안 남은 도시 가운데 한 곳이자 루아르 강을 따라 있는 전략적 요충지인 오를레앙을 공성전으로 공략하였는데, 오를레앙은 잉글랜드가 프랑스의 남은 지역을 공략하는데 있어서 마지막으로 거쳐야 하는 장애물이었다. 어떤 현대 역사학자는 당시 상황을 가리켜 “프랑스 왕국 전체의 운명이 오를레앙에 달려 있었다.”라고 표현하였다. 오를레앙이 잉글랜드의 파죽지세 같은 공격을 오래 버틸 수 있다고 판단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생애

신의 계시

잔 다르크는 프랑스 동부의 바 공작령(오늘날의 로렌 주)에 있는 작은 마을 동레미(오늘날의 동레미라퓌셀)에서 자크 다르크와 이사벨 루미의 딸로 태어났다. 잔 다르크의 부모는 약 50에이커(20헥타르) 정도 되는 땅을 소유하였으며, 그녀의 아버지는 농사 외에도 마을의 말단 관리로써 세금 징수와 치안을 담당하였다. 당시 동레미가 있는 지역은 부르고뉴파의 영토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프랑스 왕가에 대해 변함없이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잔 다르크가 어린 시절에 몇 번 적군의 공격을 받았으며, 한 번은 그녀가 살던 마을이 불태워진 적도 있었다.

잔 다르크는 법정에 섰을 당시 자신의 나이를 대략 19세쯤 되었을 것이라고 진술하였으므로, 1412년경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잔 다르크는 그녀의 나이 13세 때인 1425년에 환시를 체험하였다. 그녀의 증언에 따르면, 하루는 들판에 혼자 있었는데 성 미카엘과 성녀 가타리나 그리고 성녀 마르가리타가 그녀 앞에 나타나 잉글랜드군을 몰아내고 도팽 샤를을 대관식을 위해 랭스로 데려가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주었다고 한다. 그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떠나자 잔 다르크는 눈물을 흘렸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너무나도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영국 왕실 도서관 사본에는 잔 다르크가 잉글랜드군에 붙잡혀 마녀 재판을 받을 당시 기록에 다음과 같은 잔 다르크의 진술 내용이 씌어 있다.

16세 때, 잔 다르크는 친척 듀랑에게 동레미 인근의 보쿨뢰르로 데려가 달라고 요청하였다. 보쿨뢰르에 간 잔 다르크는 그곳에서 프랑스군 경비대 대장을 맡고 있던 로베르 드 보드리코르에게 가서 시농에 피신해 있는 프랑스 궁정을 방문할 수 있게 허락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하지만 로베르는 잔 다르크를 그냥 무시해 버렸다. 하지만 잔 다르크는 이에 좌절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찾아와 요청하였으며, 이를 로베르 휘하에 있던 장 드 메츠와 베르트랑 드 폴뤼니가 눈여겨보게 된다. 이들의 지지를 받아 잔 다르크는 로베르를 다시 만난 자리에서 자신에게 오를레앙의 어려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묘책이 있다고 말하였다.

도팽 알현

로베르 드 보드리코르는 지속적인 잔 다르크의 열정에 감동하여 결국 그녀에게 호위를 붙여 시농으로 갈 수 있게 배려해주었다. 잔 다르크는 남장을 하고 적대 세력인 부르고뉴 영토를 가로질러 시농 성으로 갔다. 시농에 있는 프랑스 궁정에 도착한 잔 다르크는 도팽 샤를을 알현하였다. 반신반의하던 도팽은 잔 다르크를 직접 만나본 후에 그녀의 도덕심과 의지에 감탄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도팽은 과연 잔 다르크가 하느님이 보낸 사자인지를 시험하기 위해 자신의 옷을 시종에게 입혀 옥좌에 앉혀놓고 자기는 변장을 한 채 가신들 속에 섞여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잔 다르크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바로 초라한 차림의 도팽 앞으로 다가가 경의를 표했다는 것이다. 한편, 도팽 샤를의 장모인 아라곤의 욜란다는 오를레앙을 구원하기 위한 원정대를 편성하기 위한 자금을 대주고 있었다.

잔 다르크는 도팽 샤를에게 자신에게 기사가 착용하는 갑옷과 무기는 물론 군대를 이끌 수 있는 지휘권을 달라고 요청하였다. 잔 다르크는 자신의 갑옷과 말, 칼, 깃발 등의 군사 원정 시 필요한 물품들을 모두 기증을 통해 어렵게 받았다. 역사학자 스티븐 W. 리키는 프랑스 왕실이 잔 다르크의 주장에 동조하여 그녀를 전폭적으로 지원한 이유에 대해서 당시 거의 붕괴하기 일보 직전에 있었던 프랑스 왕실에 있어서 잔 다르크가 이러한 난국을 타개해줄 유일한 희망으로 보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잔 다르크는 도착하자마자 장기간에 걸친 잉글랜드와 프랑스 간의 분쟁을 종교전쟁으로 효과적으로 전환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그녀의 행보에는 위험이 따랐다. 샤를의 신하들은 잔 다르크가 이단자나 마녀가 아니라는 확증 없이 섣불리 그녀를 지지하며 도와주었다가는, 적들에게 악마 숭배자라는 비난을 받을 수 있다고 조언하였다. 그리하여 샤를은 잔 다르크에 대한 신원을 조사하는 한편 그녀의 신앙심과 도덕성 등을 알아보기 위해 푸아티에에서 종교적 심사를 할 것을 지시하였다. 1429년 4월 조사단은 잔 다르크가 ‘흠잡을 구석이 없는 인생을 살아왔으며,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며, 겸손함과 정직함 그리고 소박함의 덕목을 갖추었다’고 보고하였다. 푸아티에의 신학자들은 잔 다르크가 받았다고 주장한 하느님의 계시에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하였다. 그렇지만 그녀의 주장에서 이단이나 미신적인 요소는 발견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그녀가 하느님으로부터 특별히 거룩한 임무를 받았다고 봐도 무리는 없다는 의견을 샤를에게 전달하였다.

이것만으로도 샤를에게는 충분하였지만, 신하들은 여전히 잔 다르크를 의심하며 신뢰하지 말라고 조언하였다. 결국 잔 다르크의 주장의 진실성은 오를레앙에 대한 잉글랜드군의 포위 공격을 푸는 것밖에 다른 길이 없었다.

전투중 활약

1429년 4월 29일 잔 다르크는 잉글랜드군의 포위를 받은 오를레앙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오를레앙을 지키는 프랑스군 지휘관이었던 장 도를레앙은 그녀를 전투회의에서 배제시키고 적군과 교전할 때 이 사실을 알리지 않는 등 무시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잔 다르크는 이에 굴하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지 회의 및 전투에 참여하려고 노력하였다. 사실 잔 다르크의 실제 군사적 지도력이 어느 정도였는지에 대해서는 역사학계 내에서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전통적인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는 잔 다르크가 순전히 앞에서 깃발을 휘두르며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아주는 역할을 수행했을 뿐이라는 의견이 많다. 이러한 견해는 그녀가 마녀재판을 받을 당시 재판관에게 한 진술을 토대로 한 것이다. 당시 재판장에서 잔 다르크는 자신은 칼보다는 군기를 더 선호한다고 증언하였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잔 다르크가 군 지휘관으로서 통솔력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수준급의 전략가로 보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일례로 스티븐 W. 리키는 잔 다르크가 “전쟁의 흐름을 뒤바꾼 놀라운 일련의 승리들 속에서 군대를 계속해서 이끌었다.”라고 평가하였다. 그러나 잔 다르크가 백년 전쟁에서 프랑스에게 불리하던 전세를 뒤엎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모두가 동의하고 있다.

잔 다르크는 프랑스군 지휘관들의 신중한 전략들을 전면 거부하였다. 잔이 오기 전 5개월간의 포위 기간 중에 오를레앙을 방어하던 프랑스 군사들은 딱 한번 공격적으로 나섰지만, 처참한 실패로 끝났었다. 그해 5월 4일 프랑스군은 생루 요새를 공격하여 탈환하였다. 뒤이어 5월 5일에는 생장르블랑 요새로 진격하였다. 다음날 잔 다르크는 참모회의에서 장 도를레앙의 의견에 반대하고, 적군을 재차 공격하자고 주장하였다. 장 도를레앙은 전투를 피하기 위해 성문을 모두 걸어 잠그라고 지시하였지만, 잔 다르크는 성내 주민들과 병사들을 이끌고 성주에게 가서 문을 열라고 요구하였다. 장군 한 명의 도움을 받아 잔 다르크는 군대를 이끌고 성 밖으로 나가서 생아구스탱 요새를 탈환하였다. 그날 밤 오를레앙에서 프랑스군 지휘관들은 참모회의에서 잔 다르크를 배제한 채 지원군이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잔은 5월 7일에 잉글랜드군의 주요 요새인 르투렐르 요새를 공격하자고 주장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그녀가 전투 도중에 목에 화살을 맞고서도 살아남아 전투를 지휘한 모습을 보고 그녀를 영웅으로 보게 되었다.

잔 다르크의 영웅적인 활약으로 프랑스군은 오를레앙에서 크게 승전을 거두었다. 잉글랜드군은 기세가 오른 프랑스군이 파리나 노르망디를 재탈환하기 위해 나설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하지만 잔 다르크는 이러한 잉글랜드의 예상을 깨고 도팽 샤를의 대관식을 위하여 랭스를 탈환하고자 하였고, 이를 위해 루아르 강 인근에 있는 교량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잔은 이러한 자신의 계획을 도팽에게 설명하면서 알랑송 공작 장 2세와 더불어 프랑스군의 지휘권을 자신에게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러한 그녀의 주장은 굉장히 대담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랭스는 파리보다 약 두 배나 더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적군의 영역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팽의 허락을 받은 잔은 군대를 이끌고 6월 12일에 자제오를, 6월 15일에 멍서르와르를, 그리고 6월 17일에는 보장시를 탈환하였다. 처음에는 잔을 못미더워하던 장 도를레앙을 비롯한 다른 지휘관들도 오를레앙에서의 그녀의 활약에 깊은 인상을 받고 결국 그녀의 열렬한 지지자로 선회하였다. 알랑송 공작은 잔이 와서 그에게 대포가 곧 날아와 덮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재빨리 피신시켜 다행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며 그녀에게 감사해하기도 하였다. 한편 잔은 전투 와중에 성곽공격용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다가 적군의 투석기가 쏜 돌멩이를 머리에 맞고도 버텨냈다. 6월 18일 존 패스톨프 장군이 이끈 구원군이 도착해서 잉글랜드 방어군에 합류하였다. 파타이 전투는 흡사 아쟁쿠르 전투와 비견될 수 있는데, 결말은 정반대였다. 잉글랜드 궁수들이 수비 준비를 채마치기도 전에 프랑스 선발대가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잉글랜드군의 주요 전력이 모조리 분쇄되고 지휘관들의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포로로 사로잡힘으로써 잉글랜드의 패배로 끝나버렸다. 지원하러 온 존 패스톨프는 살아남은 소수의 병사들과 함께 달아나버렸다. 반면에 프랑스군은 거의 손실을 입지 않았다.

프랑스군은 6월 29일에 지앙수루아르에서 랭스로 진격하였으며, 7월 3일 부르고뉴파가 장악하던 오세르에게 조건부 항복을 받아냈다. 그리고 프랑스군의 행로에 있던 다른 도시들 역시 아무런 저항 없이 순순히 프랑스 동맹에 복귀하였다. 도팽 샤를의 왕위계승권을 박탈하려고 했던 조약 장소였던 트루아는 4일간 공격 없는 포위에 결국 백기를 들고 항복하였다.

7월 16일 랭스는 프랑스군에게 성문을 열어주었다. 도팽 샤를의 대관식은 다음날 아침 1429년 7월 17일 랭스 대성당에서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이로써 5년 동안이나 공석이었던 프랑스 국왕이 탄생하였으며, 샤를 7세는 프랑스의 국왕으로서 그 정통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대관식이 끝나자 잔 다르크는 샤를 7세 앞에 무릎을 꿇고 “폐하, 이제 프랑스를 다스리는 진정한 국왕이 되셨습니다.”라고 말했다. 1430년 잔 다르크는 불안에 떨고 있는 도시 주민들에게 다음과 같은 격려 편지를 보냈다.

여러분은 머지않아 도시가 잉글랜드군에게 포위될 것이라는 불안한 마음을 저에게 편지로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제가 적군과 마주치는 한 그런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적이 먼저 공격해 오면 성문을 굳게 닫고 제가 올 때까지 안심하고 기다려 주십시오. 설사 도시가 포위되더라도 반드시 적들을 격퇴하여 도시를 해방시킬 것입니다. 오늘 쉴리에서 여러분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고 싶습니다만, 이 편지가 적의 수중에 들어갈까 염려되어 이만 줄입니다.

잔 다르크와 알랑송 공작은 이 기세를 몰아 신속하게 파리로 진군하자고 촉구하였지만, 프랑스 왕실은 전쟁보다는 부르고뉴파와의 협상을 통해 휴전을 맺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였다. 하지만 부르고뉴 공작은 이를 역이용하여 파리의 수비를 강화하기 위한 지연 술책으로 프랑스 왕실과 평화 협상을 하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잔 다르크가 이끈 프랑스군은 파리 인근의 도시들을 돌아다니면서 평화로운 방식으로 항복들을 받아냈다. 8월 15일 베드포드 공작이 이끈 잉글랜드군이 프랑스군과 마주보며 대치하였다. 9월 8일에 프랑스군은 파리를 공격하였다. 잔은 적진의 석궁에서 날아온 화살을 다리에 맞고서도 끝까지 군대를 계속 지휘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그녀는 회군하라는 왕의 명령을 받았다. 10월에 잔은 생피에르르무치를 탈환하고 귀족 작위를 받았다.

생포와 투옥

11월과 12월에 라샤리테쉬르루아르에서 소규모 전투가 있고 나서, 이듬해 4월에 잔은 콩피에뉴가 잉글랜드-부르고뉴 연합군의 포위 공격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이끌고 구원하러 달려갔다. 1430년 5월 23일 잔은 마리니에 있는 부르고뉴군과 격전을 벌이다가 포로로 사로잡혔다. 부르고뉴파에서 6천 명을 추가로 병력을 보내오자, 잔은 병사들에게 콩피에뉴 성으로 피신하라고 지시했고 자신은 전장에 맨 마지막까지 남아 후퇴하는 병사들의 뒤를 지켰다. 부르고뉴군은 후방에서 지원군이 오지 못하게 막는 한편 잔 다르크를 철저하게 고립시킨 다음, 활을 쏴서 말에서 떨어뜨려 사로잡았다. 처음에 잔은 항복을 거부하였다.

잔다르크가 부르고뉴군에 생포되자 잉글랜드와 로마 가톨릭 교회가 그녀의 신병인수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잉글랜드는 매우 적극적이었는데, 이는 몸값을 지불하면 포로를 석방하는 관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잉글랜드는 종교재판을 통해 잔을 마녀로 만들고자 했다. 그리하게 되면 샤를 7세는 악마와 동맹을 맺고 마녀의 도움으로 즉위한 왕이 되므로 권위와 정통성에 흠집을 낼 수 있었다. 교회가 관심을 보인 이유는 잔다르크가 신과 직접 소통한다며 교회의 위계질서를 어지럽히는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작 샤를 7세는 잔다르크의 석방 혹은 구출에 대한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샤를 7세는 훗날 역사학자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

잔은 억류되어 있는 동안 여러 번 탈출을 시도하였다. 베르망두아에 있을 때는 높이가 21미터나 되는 탑에서 해자로 뛰어내린 적도 있었는데, 결국 도로 붙잡혀 부르고뉴파에 속한 아라스로 끌려갔다. 이후 잉글랜드는 1만 리브르를 지불하고 부르고뉴로부터 잔 다르크의 신병을 넘겨받았고 1430년 12월에 그녀는 당시 잉글랜드가 지배하고있던 루앙으로 이감되었다. 잉글랜드와 부르고뉴 간의 잔에 대한 거래에서 보베의 교구장이자 친잉글랜드파인 피에르 코숑 주교가 큰 역할을 하였으며, 나중에 잔을 상대로 한 종교재판에서도 두드러진 역할을 하였다.

종교재판

잔 다르크에 대한 재판은 명목상으로는 그녀의 이단성 시비여부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지극히 정치적인 이유로 열렸다. 베드포드 공작은 조카인 헨리 6세의 프랑스의 왕위계승권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잔의 활약으로 맞수인 샤를 7세가 프랑스의 왕으로 즉위하였기 때문에, 잔에 대해 앙심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잔을 이단 혐의로 공격하는 것은 곧 그녀가 옹립한 샤를 7세의 프랑스 국왕으로서의 정통성을 훼손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리하여 잔 다르크에 대한 종교재판은 1431년 1월 9일 잉글랜드의 점령지역인 루앙에서 열렸다. 하지만 이 재판은 여러 가지 면에서 문제가 많은 재판이었다.

그 가운데 몇몇 주요 문제점들을 열거하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 교회법상 코숑 주교는 종교재판을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런 그가 종교재판관이 된 것은 잔에 대한 종교재판에 자금을 대준 잉글랜드 정부의 지지를 등에 업은 덕분이었다. 잔에게 불리한 증언을 모으는 일을 위탁받은 성직공증인 니콜라스 바이는 잔에게 불리한 증언을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찾지 못하였다. 이렇게 잔의 혐의를 입증할 수 있는 증거들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종교재판이 강행되었다. 나중에 법정 서기들은 상부의 강압에 못 이겨 재판 기록을 잔 다르크에게 불리하도록 일부 날조했다고 고백했다. 심지어 잔에게는 자문관이나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권리를 박탈함으로써 교회법을 또 한 번 위반하였다. 법정에는 그녀를 도울 증인조차 나오지 않았다. 제1차 공개심리 때, 잔은 법정에 출석한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반대하고 배척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프랑스 측의 성직자들도 마땅히 이 법정에 초대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절대적으로 불리한 입장에서 잔 다르크는 홀로 자신을 변호했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농가 출신의 18살 된 소녀가 연륜 있는 주교들과 신학자들로 구성된 심판관들과 그들의 끈질긴 유도 심문에 맞서 펼친 변론은 놀라울 정도로 논리적이고 이성적이었다. 심판관들은 읽고 쓸 줄도 모르는 그녀의 유려한 변론에 여러 번 말문이 막히기도 했다. 한 예로, 재판관들이 잔에게 “그대는 자신이 지금 은총의 상태에 있다고 생각하는가?” 하고 묻자 잔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만약 제가 은총의 상태에 있지 않다면, 하느님께서 제게 은총을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만약 제가 은총의 상태에 있다면, 하느님께서 제게 계속해서 은총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질문은 잔에게 놓은 덫이었다. 은총의 상태란 모든 죄악으로부터 해방된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 질문은 대단히 어려운 신학적 문제를 담고 있었다. 교회는 어느 누구도 스스로 자신을 하느님의 은총 안에 있다고 함부로 단언할 수 없다고 가르치는데, 만약 잔이 그렇다고 답변했다면 그녀는 이단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을 것이다. 또한, 만약 잔이 아니라고 대답했다면 그것은 그녀 스스로 자신이 죄악의 상태에 있음을 인정하는 셈이 되었을 것이다. 당시 법정 공증인의 증언에 의하면, 잔을 심문한 자들은 예상치 못한 그녀의 대답에 어찌할 바를 몰라 무척 당황스러워했다고 한다. 20세기에 조지 버나드 쇼는 이 공방에 매우 감탄하여 자신의 희극 《성녀 잔 다르크》에서 재판 기록을 그대로 인용하기도 하였다.

훗날, 당시 법정에 참석했던 관리들은 잔 다르크의 재판에 사용된 증거들 중 많은 부분은 그녀에게 불리하도록 조작된 것이라고 실토하였다. 종교재판관 장 레메트르를 포함한 많은 성직자가 잉글랜드측의 갖은 회유와 압력을 받아 재판을 진행하였으며, 심지어 개중에는 살해 위협까지 받았다. 또한 종교재판의 규정상 여성 죄수는 수녀가 관리 감독하는 특별 시설에 수감되는 것이 통례였는데, 잔은 잉글랜드인 병사들이 지키는 일반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매일같이 썩은 음식을 먹다가 식중독에 걸리거나 병사들의 구타와 폭행에 시달렸다. 심지어 코숑 주교는 잔이 교황에게 항소할 기회마저 막아버렸다. 이에 비해 잉글랜드측은 70명에 달하는 법률 자문관을 구성했다.

코숑 주교는 마지막에 잔 다르크에게 남장 혐의를 추궁했다. 당시 여성이 남장을 하거나 남성이 여장을 하는 일은 종교적인 죄였다. 잔 다르크는 남장은 남성들이 많은 군대에서 제대로 근무할 수 있기 위해, 또한 유사시에는 정조를 지키기 위해 취한 행동이었다며 반박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후에 그녀는 법정의 명령에 따라 여자 옷을 입었으나, 얼마 되지 않아 감옥을 찾아온 한 잉글랜드 영주가 그녀를 강간하려고 시도하자 다시 남자 차림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 후로 잔 다르크는 사형을 당할 때까지 머리를 자르고 남자 복장을 했다.

오랜 재판 끝에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잔 다르크는 곧바로 처형하겠다는 협박을 받고 교회의 처분을 따르겠다는 문서에 서명했다. 그녀는 문맹이었으므로 자신이 어떤 문서에 서명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화형

이단은 초범인 경우에는 경범죄에 해당하지만, 재범인 경우에는 중죄로 다루어졌다. 잔은 각서에 서명할 때 여성의 옷을 입는 것에 동의하였다. 며칠 뒤에 법정에 선 그녀는 재판관에게 ‘고귀한 혈통을 지닌 잉글랜드의 귀족이 감옥에 들어와서 자신을 무력으로 제압하려 했다.’라고 말했다. 결국 자신의 정조를 지키기 위해서, 더군다나 여성의 옷을 빼앗겨 달리 입을 옷이 없었기 때문에 잔은 다시 남성의 옷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1431년 5월 29일 법정은 잔 다르크에게 화형을 선고했다. 1431년 5월 30일 잔 다르크는 루앙의 비외 마르셰 광장에서 군중이 보는 앞에서 장대에 밧줄로 묶겼다. 잔 다르크는 광장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 수사들에게 자신이 보는 앞에서 십자고상을 높이 들어달라고 부탁하였다. 수사들은 잔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었다. 한 소작농 역시 잔을 애석하게 여겨 그녀 앞에 작은 십자가를 놓았다. 잔이 숨을 거둔 후에 잉글랜드군은 불을 끄고 새까맣게 그을린 그녀의 시신을 공개 전시하여 아무도 그녀가 살아서 빠져 나갔다는 말을 내뱉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군중이 그 유해를 가져가지 못하도록 다시 시체를 세 번이나 불에 태워서 잿더미로 만든 후에 센강에 내다버렸다. 당시 처형간수였던 조프리는 잔 다르크가 화형에 처해진 이후 자신이 언제 천벌을 받을지 몰라 매우 두려운 나날을 보냈다고 고백했다.

사후 복권

백년전쟁의 종결

1431년 12월 16일에 프랑스 파리의 노테르담 성당에서 헨리 6세(생몰 1421-1471)가 프랑스 국왕으로서 대관식을 치루었지만, 샤를 7세는 흔들림없이 자신의 정통성을 유지하였다. 1435년 아라스 조약이 체결됨으로 인하여 잉글랜드와 부르고뉴파의 동맹은 와해되었다. 같은 해에 베드포드 공작이 사망하고, 헨리 6세는 섭정 없이 잉글랜드를 통치한 역사상 가장 젊은 왕이 되었다.

그러나 헨리 6세의 유약하고 무능함으로 인하여 두 나라간의 분쟁은 빨리 종결되었다. 잔 다르크가 사망하고 나서도 22년이나 더 지속되던 전쟁은 프랑스군이 1437년 파리, 1449년 루앙을 회복했고, 1453년 사실상 종료되었다. 잉글랜드는 칼레를 제외하고 모두 빼았겼다. 켈리 드브라이스는 잔 다르크가 고안한 포격술과 적극적인 전방공격은 프랑스군의 전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남은 전쟁기간에 효과적인 전술로 사용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재심과 명예회복

잔 다르크에 대한 재심은 전쟁이 끝난 후에 열렸다. 교황 갈리스토 3세는 대심문관 장 브레알과 잔 다르크의 어머니의 요청을 받아들여 잔 다르크의 혐의에 대한 재조사 및 종교재판을 실시한다고 포고하였다. 재심의 목적은 잔 다르크에게 내려진 판결의 정당성 여부에 대한 조사였다. 조사는 1452년 시작되었으며, 기욤 부유 신부가 조사관을 맡았다. 공식적인 항소는 1455년 11월에 제출되었다.

항소에는 유럽 전역의 성직자가 대거 참여하였으며, 교회법에 따른 표준 법정 절차가 준수되었다. 신학자로 전원 구성된 배심원들은 115명의 증인들의 증언 및 증거자료들을 비교 분석하였다. 대심문관 브레알은 1456년 6월 마지막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이 보고서에 그는 잔 다르크를 순교자로 선언하고, 피에르 코숑 주교에 대해서는 세속적인 이유 때문에 무죄한 여인을 죄인으로 몰아간 이유를 들어 이단자라고 선언하였다. 1456년 7월 7일 항소심에서 잔 다르크의 모든 혐의에 대해서 무죄라는 최종 판결이 내려졌다.

재심의 정치적 의도

잔다르크에 대한 사후 복권은 순수하지 못한 의도를 가진 정치적 행위였다. 잔다르크의 도움에 의해서 프랑스 왕위에 오른 샤를 7세에게는 그녀를 복권 시켜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그녀가 계속해서 마녀로 남아 있을 경우에 샤를 7세의 정통성에 큰 문제가 되었다. 잔 다르크에 대한 종교재판은 교황청의 공식적인 승인하에 진행되었기 때문에 샤를 7세는 교회가 마녀로 규정한 악마와 동맹을 맺고 그의 도움으로 즉위한 왕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샤를 7세는 잔다르크를 복권시킴과 동시에 다시 한 번 프랑스 왕위에 대한 자신의 정통성과 명분을 바로 세우고자 하였다.

그러나 교황청은 샤를 7세의 재심요구를 받아들일수 없었다. 잉글랜드가 십자군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전하여 많은 공을 세웠기 때문이기도 하고 과거에 교회가 내렸던 결정을 다시 뒤집어야 했기에 교황청의 입장은 난처했다. 곤경에 빠진 샤를 7세는 잔 다르크의 어머니로 하여금 교황에게 편지를 쓰도록 하여 사안을 비정치화하는 외교적인 해결책을 강구하였다. 또한 과거의 종교재판 그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재판장 코숑 주교, 종교 재판소의 대표 장 르메트르, 종교 전문가 장 에스티베등 잔 다르크를 재판했던 판사들을 고발하는 형식을 취하여 재심 진행을 관철시켰다.

시복과 시성

19세기 초반에 권력을 장악한 나폴레옹은 민족주의와 애국심을 고취시키기 위해서 잔 다르크를 프랑스의 국가 상징으로 선언하면서 대중들에게 그녀를 부각시켰다. 이는 곧 큰 효과를 발휘하였으며 잔 다르크는 존경받는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1849년 펠릭스 뒤팡루 주교가 오를레앙 교구장에 착좌하면서 잔 다르크를 열렬하게 찬양하였는데, 당시 그의 강론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백년 전쟁 당시 프랑스의 적국이었던 영국에서도 크게 주목을 받아 화제가 되었다. 펠릭스 뒤팡루 주교의 헌신적인 노력 끝에 1909년 잔 다르크는 로마 교황청에 의해 복자로 시복되었다. 그리고 1920년 5월 교황 베네딕토 15세는 잔 다르크를 성인으로 시성하였다.

이로써 잔 다르크는 마녀에서 성인으로 변신한 전무후무한 인물이 되었다. 성인이 된 잔 다르크는 오늘날 가톨릭교회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사랑받고 공경을 받는 성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가톨릭교회 내에서는 잔 다르크를 라틴어식 명칭인 아르크의 요안나 또는 요안나 아르크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작품

  • 방송
    •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 문학
    • 《헨리 6세》셰익스피어 - 극중에서는 잔 라 퓌셀인 잔 다르크는 여기서 철저히 악인으로 그려진다.
    • 《오를레앙의 처녀》볼테르 - 시.
    • 《오를레앙의 처녀》프리드리히 실러 - 낭만주의 시.
    • 《Saint Joan》버나드 쇼 - 희곡으로 쇼의 작품들 중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 《애국부인전》장지연 - 한일 병합 이전에 나온 민족주의 성격의 애국소설. 애국소녀이자 민족의 지도자로서의 잔 다르크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는데, 삼위일체 하느님을 세 천신으로 묘사하는 등, 기독교 교리에 대한 작가의 이해가 담겨 있다.
    • 《잔 다르크》마크 트웨인- 마크 트웨인의 인물소설. 잔 다르크를 신심이 깊고 영리한 여성으로 묘사한다.
    • 《자히르》파울루 코엘류 - 소설의 등장인물인 동아시아 몽골계 카자흐스탄 청년이 간질병의 증세를 보여준다. 이 청년의 간질병과 계시 능력에 관해 설명을 하면서 잔 다르크의 계시도 사실은 간질병과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 음악
    • 《오를레앙의 처녀》 - 차이콥스키 (오페라)
    • 《조반나 다르코》 - 베르디 (오페라)
    • 《화형대 위의 잔 다르크》 - 오네게르 (오라토리오)
    • 《Jeanne D'Arc 》- 탠저린 드림 (전자음악)
  • 영화
    • 《잔 다르크의 수난》(1928년) - 흑백 무성영화.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 감독. 마리아 팔코네티 주연.
    • 《Jeanne La Pucelle》(1994년) - 프랑스에서 방영된 텔레비전 미니시리즈.
    • 《잔 다르크》(1999년) - 뤼크 베송 감독, 밀라 요보비치 주연.
    • 《The Messenger: The Story of Joan of Arc》(1999년) - 텔레비전 미니 시리즈. 리리 소비에스키 주연.
  • 만화
    • 《쟌느》(1995년-1996년) 요시카즈 야스히코 - 백년전쟁을 무대로 잔 다르크와 비슷한 운명을 지닌 소녀의 이야기를 그린다.
    • 《신풍괴도 쟌느》(1998년~2000년) 다네무라 아리나
  • 게임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에이지 오브 킹스》 - 잔 다르크의 행적을 다룬 캠페인이 등장한다.
    • 《JEANNE D'ARC》(2006년) - 잔 다르크의 생애를 모티브로 한 플레이스테이션 포터블용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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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 백년 전쟁
  • 샤를 7세
  • 질 드 레
  • 헨리 6세

각주

참고 문헌

외부 링크

  • (영어) Jeanne d'arc Centre
  • (영어) Joan of Arc
  • 전자도서관 - 《애국부인전》에 대한 언급이 있다.
  • 네이버캐스트 - 잔 다르크
  • 팟캐스트 - 주경철의 《유럽인 이야기》 잔다르크
  • 주경철 <서양 근대 인물 열전> 잔 다르크, 성녀인가 마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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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프랑스어: À la recherche du temps perdu), 줄여서 La Recherche는 마르셀 프루스트가 1906년부터 1922년까지 집필하여 1913년부터 1927년까지 출간한 7권의 장편 소설로, 마지막 3권은 작가 사후 출판되었다. 이 소설은 정해진 사건들을 단순히 나열한 이야기나 화자의 회상이라기보다는, 문학, 기억, 시간에서의 심리적 반영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장이브 타디에가 <프루스트와 그의 소설>에서 지적한 것처럼, 소설내 분산된 모든 요소들은, 프루스트의 부정적 또는 긍정적 경험을 통하여, 화자(이 소설의 주역이기도 한)가 마지막 권에서 예술과 문학의 의미를 알아차릴 때에, 서로간의 연관을 띄고 있음이 드러난다

때때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당대 최고의 책으로 거론되곤 한다.

개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총 7부로 구성되어 있다.

  1. 〈스완네 집 쪽으로〉(Du Côté de chez Swann), 작가 스스로 비용 부담하여 1913년 그라세에서 출간; 1919년 갈리마르에서 개정판 출간.
  2. 〈꽃피는 아가씨들 그늘에서〉(À l'ombre des jeunes filles en fleurs), 1919년 갈리마르에서 출간, 같은 해 공쿠르상 수상
  3. 〈게르망트 쪽〉(Du côté de Guermantes), 총 두 권, 1920년-1921년 갈리마르에서 출간
  4. 〈소돔과 고모라 I · II〉(Sodome et Gomorrhe), 1921년-1922년 갈리마르에서 출간
  5. 〈갇힌 여자〉(La Prisonnière), 작가 사후 1923년 출간
  6. 〈사라진 알베르틴〉(Albertine disparue), 작가 사후 1925년 출간, 원제 <도망간 여자> (La Fugitive)
  7. 〈되찾은 시간〉(Le Temps retrouvé), 작가 사후 1927년 출간

이렇게 권을 나눈 것을 고려할 때에, 프루스트는 집필 활동과 출간을 병행하고 있으며, 소설에 대한 구상은 이 과정에서 변화한다.

르네 블룸 덕에 1913년 그라세에서 자비 출판으로 제1부가 나왔으나, (프루스트는 자신만의 문학적 특성을 유지했다) 뒤이어 벌어진 전쟁은 제2부의 출간을 방해하였고, 프루스트로 하여금 자신의 작품을 고칠 기회를 주는데, 매번 밤을 꼬박 새는 작업으로 그는 지쳐갔다. 작가는 타자기 원고뿐만 아니라 초고, 육필 원고 가릴 것 없이 계속 재작업했으며, 현 출판사와의 작업을 끝내고자 했다. 가스통 갈리마르가 편집자인 <누벨 르뷔 프랑세즈; NRF>는 1914년부터 그라세 출판사와의 편집 전쟁의 한가운데 속에 있었으나, 1913년 NRF의 편집위원장이던 앙드레 지드가 <스완네 집쪽으로>를 <르 피가로> 경영인 가스통 칼메트에게 헌정한 스노비즘의 책이라 평하며 출판을 거절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

스완네 집 쪽으로

꽃피는 아가씨들 그늘에서

게르망트 쪽

소돔과 고모라

갇힌 여자

사라진 알베르틴

되찾은 시간

분석

반영 요소

프루스트의 방식은 역설적이다. 작가의 사생활이 소설에 있어 큰 영향을 끼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Research에서, 매우 구체적인 환경(20세기 초 프랑스 귀족 및 상류층 부르주아)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사소한 세부묘사 하나하나까지 묘사되어, 프루스트로 하여금 보편성에 이르게끔 한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나je라는 단어로 책을 시작하여야 했던 불행을 겪었고 그 직후, 보편법을 찾아내고자 탐구하는 것 대신, 나는 스스로 이 단어의 개체적이며 가증스러운 면을 분석했다"며 서술했다..

영향

그렇지만 프루스트 작품의 철학과 미학은 당대의 사상과 완전히 단절할 수는 없었다.

  •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의 철학 : 앤 헨리는 프루스트에 있어 쇼펜하우어 철학의 영향을 첫째로 친다.,
  • 가브리엘 타르드의 사회학,
  • 인상주의,
  • 리하르트 바그너의 음악,
  • 드레퓌스 사건.

프루스트의 문체는 매우 독창적이다. 길고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는 프루스트의 문장은 그가 가장 자주 인용한 작가들 가운데 한 명인 생시몽 공작의 문체를 떠올리게 한다. 몇 문장은 독자가 그 문장의 구조를 살펴 그 엄밀한 의미를 파악하는 데에 일정 수준의 노력을 필요로 한다. 프루스트 당대의 사람들은 작가의 문체가 작가의 일상어와 얼추 가깝다는 점을 증언했다.

생시몽의 영향이란 면에서, 자크 드 라크르텔은 “짧지만 명확하며 고증이 철저한 <마르셀 프루스트와 생시몽 공작>이란 제목의 연구서를 쓴 미국인 교수 허버트 드 레이 씨는 프루스트가 묘사한 400명 가량의 귀족 인물들 태반은 <생시몽의 수상록>에 등장하는 이들의 이름을 따왔음을 확인했다”고 인용한다.."

잃시찾의 시대와 장소에 관하여

잃시찾의 줄거리는 확실히 규정된 시간에서 펼쳐진다. 역사적 사건에 대한 수많은 언급은 잃시찾의 시간적 배경을 확실히 만든다. 아래가 그 예시이다.

  • 베르뒤랭의 살롱을 자주 드나들기 시작했을 무렵의 스완은 엘리자궁에서 대통령 쥘 그레비와 어느날 식사를 한다; 베르뒤랭네는 강베타 장군의 장례식에 간다..
  • <꽃피는 아가씨 그늘에서>에서는 1896년 가을에 있었던 니콜라이 2세의 파리 방문이 언급된다.

비슷하게, 잃시찾 속의 장소들은 보통 실존하는 장소이다..

  • 오데트 드 크레시가 스완을 만나던 시절, 그녀는 개선문 뒷편의 라 페루즈 로에 살고 있었다; 스완은 오를레앙 강변에 살고 있었다.
  • 화자와 질베르트 스완은 샹젤리제 공원에서 논다.

주요 인물

  • 화자
  • 화자의 어머니
  • 화자의 할머니
  • 알베르틴
  • 프랑수아즈
  • 샤를 스완 : 샤를 아스에서 영감을 따옴
  • 오데트 스완 : 프루스트와 폴 부르제의 친구이던 로르 헤이먼(Laure Hayman)이 오데트의 모델로 추정됨
  • 질베르트 스완
  • 로베르 드 생루 ; 레옹 라지비우 공에게서 일부, 가스통 아르망 드 카이야베와 기슈 공에게서 영감을 받음
  • 샤를뤼스 남작
  • 게르망트 공작부인 : 주로 스트로스 부인, 슈비녜 백작부인, 엘렌 스탕디슈, 그레퓔 백작부인에게서 영감을 받음
  • 베르뒤랭 부인 : 아르망 드 카이야베 부인에게서 일부 영감을 받음

이외에도 예술계(문학의 베르고트, 음악의 뱅퇴유, 회화의 엘스티르)와 의학(코타르 의사) 등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인물들이 등장한다.

판본

  • 갈리마르 : 갈리마르에는 같은 텍스트를 둔 네 판본이 있다 :
    • 플레야드 : 총 4권, 가죽 양장, 주석과 이본 포함.
    • 폴리오 : 총 7권, 문고본
    • 블랑슈 총서 : 총 7권, 일반 판형
    • 카르토: 1권, 일반 판형
  • 가르니예-플라마리용 : 총 10권, 문고본
  • 리브르 드 포슈 : 총 7권, 문고본
  • 부캥: 총 3권, 일반 판형
  • 옴니뷔스: 총 2권, 일반 판형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전집, 텔렘 출판사, André Dussollier, Guillaume Gallienne, Michaël Lonsdale, Denis Podalydès, Robin Renucci, Lambert Wilson 대독.

한국어 역본

  • 정음사
  • 국일미디어
  • 펭귄
  • 동서문화사
  • 올재클래식스
  • 민음사 (미완, 2022년 완간 예정)

참고 문헌

개괄서
전공서

읽어 보기

한국어판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 스완네 집 쪽으로 1》, 민음사 ISBN 978-89-374-8561-9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 - 스완네 집 쪽으로 2》, 민음사 ISBN 978-89-374-8562-6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1》, 민음사 ISBN 978-89-374-8563-3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2》, 민음사 ISBN 978-89-374-8564-0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5 - 게르망트 쪽 1》, 민음사 ISBN 978-89-374-8565-7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6 - 게르망트 쪽 2》, 민음사 ISBN 978-89-374-8566-4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7 - 소돔과 고모라 1》, 민음사 ISBN 978-89-374-8567-1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8 - 소돔과 고모라 2》, 민음사 ISBN 978-89-374-8568-8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9 - 갇힌 여인 1》, 민음사 ISBN 978-89-374-8569-5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0 - 갇힌 여인 2》, 민음사 ISBN 978-89-374-8570-1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1 - 사라진 알베르틴》, 민음사 ISBN 978-89-374-8571-8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2 - 되찾은 시간 1》, 민음사 ISBN 978-89-374-8572-5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3 - 되찾은 시간 2》, 민음사 ISBN 978-89-374-8573-2

ㄴ전13권 (2022년 11월 18일 완간)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국일미디어 ISBN 89-7425-180-9
한국어판 만화책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열화당, 1999~2007)
관련된 책들
  •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 알랭 드 보통, ISBN 89-8498-442-6
  • 《Figures III》, Gérard Genette, Paris: Seuil,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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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 르 몽드가 선정한 세기의 도서 100권
  • 모노노 아와레

각주

외부 링크

  • 위키미디어 공용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관련 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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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정부수반 목록


프랑스 정부수반 목록


이 문서는 1598년부터의 프랑스 정부 수반 명단이다.

프랑스는 왕정복고 시대인 1815년의 국무회의 의장인 샤를모리스 드 탈레랑페리고르부터 현 총리(2020년), 장 카스텍스까지 총 172명의 정부 수반을 두었다.

정부 수반 직함

역사적으로 프랑스 정부 수반 직위는 여러 직함으로 다르게 불렸다.

  • 앙시앵 레짐 : 수석국무장관(Principal ministre d'État)
  • 1792-1815: 정부수반 부재
  • 1815-1849: 국무회의 의장(président du Conseil des ministres) (부재 기간 존재)
  • 1849-1869: 정부수반 부재
  • 1870: 내각수반(chef du Cabinet)
  • 1870-1871: 국민방위정부 통령(président du gouvernement de la Défense nationale)
  • 1871-1876: 국무회의 부의장(vice-président du Conseil des ministres)
  • 1876-1940: 국무회의 의장(président du Conseil des ministres)
  • 1940-1942: 국무회의 부의장(vice-président du Conseil des ministres)
  • 1942-1944: 정부 수반(chef du gouvernement)
  • 1944-1947: 임시정부 통령(président du gouvernement provisoire)
  • 1947-1959: 국무회의 의장(président du Conseil des ministres)
  • 1959- : 총리(Premier ministre)

"총리(Premier ministre)"라는 직함은 오직 1959년 이후(제5공화국)부터 사용된 직함이나, 앙시앵 레짐 시절 쉴리(1589년)부터 튀르고(1789년)에 이르기까지 국왕 수석장관을 일컫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 표현이다. 1815년부터 1959년까지 전통적으로 정부 수반을 일컫는 직함은 국무회의 의장(Président du Conseil)이었다. 국가 수반과 의회의 관계에 있어서 정부 수반라는 존재는 의회체제의 핵심적인 특징 중 하나이다. 국무회의 의장은 루이 필리프 치세에 매우 중요한 직함으로 여겨졌다. 국무회의 의장이라는 직함은 1849년부터 시작된 프랑스 제2공화국의 대통령제와 함께 사라졌으나 1871년에 먼저 국무회의 부의장(vice-président du Conseil)이라는 직함으로 부활했다. 헌법 투표로 제3공화국이 성립된 이후, 국무회의 부의장은 1876년 다시 국무회의 의장이라는 직함을 되찾았으나, 이전 체제에서처럼 헌법에 명시되지 않은 채 있었다. 결국 국무회의 의장은 제4공화국의 도래(1946년)와 함께 공식화되었으며, 이후 제5공화국에서는 총리(Premier ministre)라는 직함이 도입되었다.

연보

앙시앵 레짐 (1598-1792)

앙시앵 레짐 시절, 프랑스 총리로도 불린 수석국무장관은 수석 고문이자 프랑스 왕의 정부 수반이었다. 직함과 직무는 공식적인 것으로, 왕은 전권을 지녔다.

다음 목록은 공식적으로든 실질적으로든 총리직을 수행한 여러 인물들을 나열한 것이다.

1792-1814 시기

1792년부터 1815년까지 뒤이은 체제들에서는 정부 수반 직위가 부재했다.

1차 왕정복고 (1814-1815)

백일천하 (1815)

2차 왕정복고 (1815-1830)

7월왕정 (1830-1848)

제2공화국 (1848-1852)

명단

기간

제2제국 (1852-1870)

제2제국 시기, 장관들은 사실상의 정부 수반이라 할 수 있는 황제의 변덕에 따라 임명되고 해임되었다. 제국이 몰락할 무렵에는 에밀 올리비에와 샤를 쿠쟁몽토방이 "내각수반(chef du Cabinet)"이라는 직함을 지녔다.


국민방위정부 (1870-1871)

제3공화국 (1871-1940)

명단

특이사항

  • 다음 9명의 정부 수반은 국무회의 의장으로 임명될 때 국회의장이었다. 루이 뷔페, 레옹 강베타, 앙리 브리송 (1, 2기), 샤를 플로케, 장 카지미르페리에, 샤를 뒤퓌, 폴 팽르베 (2기), 에두아르 에리오 (2기), 페르디낭 부이송
  • 그 중 5명은 한 차례 더 국회의장을 역임했다. 샤를 플로케, 장 카지미르페리에, 앙리 브리송, 에두아르 에리오 (2기), 페르디낭 부이송
  • 쥘 멜린은 국무회의 의장이 되기 전 국회의장에 재임했으며, 레옹 부르주아는 이후 국회의장이 되었다.
  • 다음 5명의 정부 수반은 이후 상원 의장이 되었다. 쥘 페리, 에밀 루베, 아르망 팔리에르, 레옹 부르주아, 가스통 두메르그
  • 다음 5명의 정부 수반은 훗날 대통령이 되었다. 아돌프 티에르, 장 카지미르페리에, 에밀 루베, 아르망 팔리에르, 가스통 두메르그
  • 두 명의 정부 수반은 임기중 대선에서 승리하여 대통령에 올랐다. 레몽 푸앵카레, 알렉상드르 밀랑
  • 두 명의 전 대통령은 다시끔 국무회의 의장이 되었다. 레몽 푸앵카레(두 차례), 가스통 두메르그
  • 피에르 발데크루소, 조르주 클레망소, 레몽 푸앵카레는 제3공화국을 통틀어 약 삼 년 동안 연이어 임기를 보낸 세 명의 국무회의 의장이다.
  • 다음 정부 수반은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알베르 드 브뢰유, 쥘 뒤포르, 레몽 푸앵카레, 조르주 클레망소, 필리프 페탱

기간

프랑스국/자유 프랑스 (1940-1944)

페탱 정부는 1940년 6월 22일 휴전 협정을 채결했다. 같은 해 7월 10일 비시에서 국회가 열려 페탱 장군에게 전권을 위임하는 투표가 이뤄졌다. 다음날 페탱은 자신을 "프랑스 국가수반"으로 칭하는 입헌권를 행사하여, 이후 1944년 8월 20일까지 국가수반직을 맡게 된다. 페탱은 더 이상 공식적으로 국무회의 의장이 아니었으나, "행정권의 전권"을 행사할 수 있음에 근거하여 이 직함 역시 유지하게 된다. 국가수반은 "국무회의 부의장"이 보좌했으며, 이 직함은 이후 정부체제에서도 자연스레 유지되었다. 국가수반과 정부수반의 직무가 애매하게 혼동된 이 같은 상황은 1942년 4월 18일 헌법에 "정부수반"의 직무가 국가수반의 책임하에 "프랑스 대내외 정책의 효율적 지도"를 확실히 이행하는 것으로 공표될 때까지 이어졌다.

드 골 장군은 휴전에 반대하는 1940년 6월 18일 호소에 이어 런던에서 자유 프랑스 저항 조직을 이끌었다. 자유 프랑스는 제3공화국을 계승한 공화정이자 프랑스를 대표하는 유일한 정권이라 주장했다. 완전한 정부는 1941년 9월 24일 프랑스 국가위원회(Comité national français; CNF)라는 이름으로 성립하였다. 1943년 6월 3일 연합국에 의해 프랑스령 북아프리카가 해방되자, 자유 프랑스는 알제에 있던 프랑스군 및 시민 총사령부(Commandement en chef français civil et militaire)와 통합하여 프랑스 국가해방위원회(Comité français de Libération nationale; CFLN)를 창립하였다. 처음에는 샤를 드 골과 앙리 지로가 국가해방위원회 위원장을 공동으로 맡았으나, 1943년 8월 4일 드 골이 유일한 위원장으로서 행정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위원회는 1944년 6월 3일까지 일 년 간 프랑스 식민지의 일부를 통치했으며, 이후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점차 해방되어가던 본토에서의 국권 행사를 위해 프랑스 공화국 임시 정부(Gouvernement provisoire de la République française; GPRF)로 명칭을 바꾸었다.

프랑스 공화국 임시정부 (1944-1947)

프랑스 공화국 임시정부(GPRF)에서는 1946년 10월 27일 헌법이 도입될 때까지, 그리고 1947년 1월 제4공화국이 출범할 때까지, 정부 수반과 국가 수반이 동일하였다.

명단

기간

제4공화국 (1947-1959)

명단

특이사항

  • 다음 11명의 국무회의 의장은 임기 종료 이후 다른 장관직을 맡았다. 폴 라마디에, 로베르 쉬망, 앙드레 마리, 앙리 쾨이유, 조르주 비도, 르네 플레뱅, 에드가 포르, 앙투안 피네, 기 몰레, 모리스 부르제모누리, 피에르 플리믈랭
  • 에드가 포르는 이후 국회의장이 되었다.
  • 다음 두 명의 국무회의 의장은 임기 동안 대선에 도전했다. 조제프 라니엘 (1953), 샤를 드 골 (1958)
  • 다음 세 명의 정부 수반은 임기 종료 이후 대선에 도전했다. 앙투안 피네 (1953), 조르주 비도 (1953), 샤를 드 골 (1965)

기간


제5공화국 (1959-)

명단

기간

특이사항

  • 로랑 파비위스는 제5공화국 총리 중 가장 젊은 총리였다(임기 시작 기점으로 37세)..
  • 피에르 베레고부아는 제5공화국 총리 중 가장 나이 많은 총리였다(임기 시작 기점으로 66세).
  • 프랑수아 피용은 자신을 임명한 대통령 니콜라 사르코지의 임기가 끝날 때까지 총리직을 계속 맡은 유일한 총리이다. 즉 피용은 사르코지 임기 중의 유일한 총리이다.
  • 자크 시라크는 총리를 맡은지 몇 년이 지난 이후 다시 한번 총리로 임명된 유일한 총리이다.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대통령 임기에 6대 총리로, 이후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 임기에 10대 총리로.)
  • 에디트 크레송은 유일한 여성 총리이다.
  • 다음 두 명의 총리는 임기 종료 이후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조르주 퐁피두 (총리 임기 종료 후 11개월 후), 자크 시라크 (임기 종료 후 7년 후).
  • 샤를 드 골은 1958년 간선 보통선거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을 때 정부 수반이었다. (제3공화국 시기 레몽 푸앵카레와 알렉상드르 밀랑도 정부 수반을 맡고있을 때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 다음 세 명의 총리는 임기 중 "동거정부" 상황에 놓였다. 자크 시라크, 에두아르 발라뒤르, 리오넬 조스팽. 세 총리는 모두 다음 대선에 출마하여 낙선하기도 했다.
  • 다음 네 명의 총리는 총리 임기 종료 이후 다른 장관직을 맡았다. 미셸 드브레, 로랑 파비위스, 알랭 쥐페, 장마르크 에로.
  • 다음 두 명의 총리는 국회의장을 맡았다. 자크 샤방델마스, 로랑 파비위스.
  • 다음 두 명의 총리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미셸 드브레, 피에르 메스메르
  • 피에르 베레고부아는 임기가 끝나고 한달이 지난 1993년 5월 1일 자살했다.
  • 도미니크 드 빌팽은 선출직을 맡지 않은 유일한 총리이다.
  • 마뉘엘 발스는 프랑스인으로 태어나지 않은 유일한 총리이다.
  • 로랑 파비위스, 리오넬 조스팽, 알랭 쥐페는 헌법평의회 의원으로 지명되었다.
  • 다음 두 명의 총리는 임기 전 대선에 출마했다. 미셸 로카르 (1969), 리오넬 조스팽 (1995).
  • 다음 세 명의 총리는 임기 중 대선에 출마했다. 자크 시라크 (1988), 에두아르 발라뒤르 (1995), 리오넬 조스팽 (2002). 세 명 모두 낙선했다.
  • 다음 여섯 명의 총리는 임기 종료 이후 대선에 출마했다. 미셸 드브레 (1981), 조르주 퐁피두 (1969), 자크 샤방델마스 (1974), 자크 시라크 (1981, 1995, 2002), 레몽 바르 (1988), 프랑수아 피용 (2017). 참고로 로랑 파비위스는 2007년 프랑스 대선을 앞두고 사회당 후보 경선에 참가했으나 떨어졌고, 도미니크 드 빌팽은 2012년 프랑스 대선에서 충분한 후원자수를 채우지 못하여 출마 실패했으며, 2017년 프랑스 대선을 앞두고 알랭 쥐페는 우파 및 중도파 후보 경선에, 마뉘엘 발스는 시민당 후보 경선에 참가했으나 떨어졌다.

각주

참고

참고 문헌

  • 필리프 아르당, Le Premier ministre en France, 몽크레티앵, 155쪽, 1991 ISBN 978-2-7076-0497-2
  • 라파엘 바케, L'Enfer de Matignon : Ce sont eux qui en parlent le mieux, 푸앵, 318쪽, 2010 ISBN 978-2-7578-1640-0

같이 보기

  • 프랑스의 정부
  • 국무회의 의장 (프랑스)
  • 프랑스의 총리
  • 프랑스 정부의 역사
  • 프랑스의 군주 목록
  • 프랑스의 대통령 목록

외부 링크

  • 프랑스 제5공화국 내각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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